[전문가 칼럼] 소비자 맞춤형 산업사회 대비해야

2018-09-02

이태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화재안전연구소 소장

얼마 전 정부의 한 부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보일러와 냉동기 등 공조설비 제조회사 대표들이 몰려와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대기업들이 공조시장에 뛰어들면서 중소기업들이 다 문을 닫게 생겼다며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는 것이다. 당초 중소기업이 담당하던 공조산업분야에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들이 뛰어들면서 기존 시장이 그들에게 잠식되는 현상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최근 유가변동에 따른 에너지문제와 온실가스 감축압박에 따라 에너지절약을 위한 소비자들의 요구가 다양해졌다. 대규모 자본으로 갖춘 자동화된 생산시설을 무기로 대량생산을 추구하는 대기업이 이러한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기가 쉽지 않기에 앞으로 중소기업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질 것이라는 평소 주장과 배치돼 이와 같은 현상은 더욱 의아했다. 소비자의 다양화된 요구를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이 더 잘 만족시켜줬다는 것인데.


문제는 엉뚱하게도 소비자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고자 설치되는 에너지관리시스템에서 불거졌다. EMS의 폐쇄성으로 많은 중소기업들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것이다. 즉 기존 자동화시스템과 동일한 방식의 폐쇄형 운영체계를 가진 에너지관리시스템은 해당 플랫폼만의 고유 프로토콜을 지니고 있어 기본적으로 다른 제품이 연결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소비자 요구를 더 잘 맞출 수 있는 주체가 공급자 주도의 관리시스템에 의해 차단된 격이다.


10년 쯤 전의 일이다. 각종 에너지절약기술을 개발하며 앞으로는 새로 건물을 짓는 것보다는 유지관리기술에 대한 수요가 크게 많아질 거라는 생각에 관련 기술을 개발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소비자들에게 유용한 기술들이다. 하지만 실증 이후의 적용단계에 벽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알고리즘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관리시스템에 포함해야 하는데 그 대상을 찾는 게 불가능했다. 지금 공조설비업계가 겪는 애로와 다름이 없다.


요즘 유행하는 플랫폼이란 기차나 버스승강장과 같이 수요자와 공급자가 만나서 다양한 교류와 가치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생태계를 말한다. 제조업 중심의 기존 사회에서는 물류와 자본이 몰리는 교통의 요지가 플랫폼의 역할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사람과 정보가 모여드는 매개공간이 역할을 대체할 것이다. 플랫폼을 공급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소비자는 큰 불편이나 손해를 보기 쉽다. 개방형 플랫폼이 필요한 이유다.


개방형 플랫폼은 글자 그대로 완전히 열려 있어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생태계다.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며 만들어주면 그대로 써야 하는 과거의 폐쇄적인 플랫폼인 기존시장과 구별된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원하는 것이 없으면 공급자에게 요구할 수도 있다. 여기서 공급자는 기존 산업사회의 대기업은 아닐 것이다. 주변의 전문가나 중소기업일 가능성이 높다. 거래 대상으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물론 서비스도 가능하다.


개방형 플랫폼을 이용한 에너지관리시스템은 누구나 쉽게 설치해 이용할 수 있다. ICT분야 등의 전문가에게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른바 라이브러리에서 설비와 에너지의 관리용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구하면 된다. 마치 마트에 진열된 상품을 바구니에 담듯 상용화된 제품들을 구입해 스스로 이용할 수 있다. 장치를 현장에 설치하는 것과 같은 작업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찾는 기능의 제품이 없으면 플랫폼에 개발이나 생산을 요청할 수도 있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자본가들에게 집중되고 인간의 노동조차도 자본에 예속된 형태가 오늘날의 자본주의다. 인류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켜준 자본주의도 이제 한계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앨빈 토플러는 이를 제3의 물결이라 했고 제러미 리프킨은 3차 산업혁명이라고도 했다. 어떤 것이든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이 놓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대규모 자본이 없이도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저렴하게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형태일 것이다.


공조설비업계 대표들이 정부에 요구한 건 다름 아닌 개방형 플랫폼이었다. 정부 관료는 대기업의 독점을 막고 중소기업의 활동을 보장해줄 수 있게 개발된 개방형 플랫폼의 사용을 의무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개방형 플랫폼은 지금과 같이 자본과 정부가 이끄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조설비업계가 정부에 하소연하기에 앞서 기술발전과 소비자 요구의 변화를 먼저 인식하고 반응해야 하는 이유다.

칸 기자 kharn@kharn.kr
저작권자 2015.10.01 ⓒ Kh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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