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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무관심…설비업계 ‘흔들’

‘규정 전무’ 건축설비 내진, 1988년부터 제자리
전도·낙하·발화 등 2차 피해 예방 방안 시급


44대 254. 2015년과 2016년 발생한 지진횟수 비다. 6배에 가까운 수치이며 2015년까지의 평균 발생횟수 47.8회에 비교해도 5배가 넘는다. 기상청은 해마다 직전해에 있었던 규모 2.0 이상의 지진을 공식 통계로 집계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9월에는 우리나라 관측 이래 가장 강력한 규모 5.8 지진이 경주를 덮쳤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진동을 느낄 수 있는 규모다. 이후 규모 2.0 이하를 포함한 여진이 올해 3월 말까지 601차례 발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지진에 대한 공포가 확산됐다.

일각에서는 지진공포가 과도한 우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실적으로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조산대에 위치한 국가에서 발생하는 정도의 대규모 지진은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2013년 93회 지진이 발생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254회, 올해는 상반기까지만 71회의 지진이 발생했다. 통상 횟수가 많아질수록 강력한 규모의 지진발생 빈도가 많아짐을 고려할 때 결코 안심할 수 없는 통계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규모 7~8 정도의 지진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통계적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규모 7.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면 약 2년 후 한반도에 규모 5.0정도의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규모 9.0임을 감안하면 경주지진 이상의 지진발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라시아판 내부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태평양판, 남동쪽으로 필리핀판, 북동쪽으로 북아메리카판이 마주하고 있다. 국민안전처는 판 경계에 위치한 일본 등에 비해 우리나라는 지진발생 빈도가 낮고 주기가 길지만 지질구조상 지각이 약한 단층구조가 많기 때문에 판 경계에서 발생한 지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라 국민적으로 지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제도적으로도 내진에 관한 규정이 정비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건축설비내진은 상황이 다르다. 건축설비는 부피와 중량이 크고 가스·냉매·전력 등 발화 및 폭발요소가 많은 만큼 지진발생 시 전도·낙하에 의한 인명피해, 구조활동 방해, 파손에 의한 인화물질 누출 등 2차 피해가 우려된다.

그럼에도 건축설비의 내진설계는 제도는 물론 업계마저 외면한 실정이다. 건축설비내진의 실태를 살펴보고 향후 방향을 모색해 본다.

대한민국, 내진 준비됐나
우리나라 건축물 내진설계 규정은 1988년 마련됐다. 당시 ‘건축법 시행령’은 6층 이상 10만㎡ 건축물에 의무적으로 내진설계를 하도록 규정했다.

이후 4차례의 개정을 거쳐 올해 2월 2층 이상, 500㎡ 이상 건축물로 대상이 확대돼 현재 적용되고 있다.

최근 국토교통부는 한층 강화된 내진설계 규제를 입법예고한 상태다. 개정안에 따르면 2층 이상 또는 200㎡ 이상 건축물과 모든 신축주택으로 대상이 확대됐다. 다만 지진에 강한 목조건물의 경우에는 종전과 같은 500㎡ 이상 건축물만 의무대상이다. 개정안은 오는 8월경 공포돼 12월 시행될 전망이다.

올해만 해도 벌써 두 번째 개정이다. 1988년 이래 통상 7~10년 간격을 두고 강화됐던 것에 비해 지난번 개정은 2년 만에, 이번 개정은 10개월 만에 이뤄졌다. 이에 따라 건축물의 내진설계 규제는 속도를 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건축설비내진 ‘오리무중’
반면 건축설비내진 기준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1988년 당시 건설교통부의 ‘건축물의 구조기준 등에 관한 규칙’ 제14조에는 건축설비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다. 그러나 ‘안전하게 정착시켜야 한다’라고만 돼 있을 뿐 구체적인 규정이 없어 유명무실했다.

심지어 2005년 개정되면서 오히려 건축설비관련 부분이 빠졌다. 이후 9차례나 개정됐지만 삭제된 조항은 부활하지 않고 있다.

다른 법령도 마찬가지다. 건축물의 내진의무 대상을 규정하고 있는 ‘건축법 시행령’에도 건축설비의 내진과 관련된 내용은 포함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또한 ‘지진·화산재해대책법’ 역시 구체적인 기준 없이 선언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민안전처의 관계자는 “건축설비는 건축의 하위 개념으로 다뤄지고 있어 국토부 소관”이라고 밝혔으나 국토부의 관계자는 “건축설비 내진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라고 답했다.

현재 건축설비의 내진기준을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은 학회가 유일하다. 소비자, 사용자의 외면 속에 한국설비기술협회, 대한설비공학회 등이 연구 및 조사활동, 위원회 설치와 같은 노력으로 건축설비 내진설계를 촉구하고 있다. 이마저도 학계 내에서 연구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관심을 두지 않는 분야여서 성과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소방설비 내진과 비교
소방설비의 경우는 내진설계를 위한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안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따라 지진발생 시 구조작업 등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법제화가 급물살을 탔다.

소방시설의 내진설계는 시작부터 상당히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업계의 관계자는 “2015년 11월 제정돼 2016년 1월부터 시행된 국민안전처의 ‘소방시설의 내진설계 기준’은 미국, 유럽수준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소방설비에 내진설계를 적용하게 되면 설비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버팀대를 설치하게 된다. 고시에 따르면 버팀대에 전달되는 지진하중 계산에 적용되는 계수를 0.5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만약 하중이 1,000kg인 건물이 있고 계수가 0.5라고 하면 지진이 발생했을 때 건물에 작용하는 지진하중을 500kg으로 계산한다는 의미다.

이 계수는 미국방화협회(NFPA)의 것을 따온 것이다. NFPA는 건물이 위치한 지형의 지반과 건물의 용도를 고려하고 2,400년 주기로 올 수 있는 최대지진을 견디도록 내진설계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계산할 여력이 안 된다면 지진하중 계수를 0.5로 설정하라고 권고한다. ‘불의 고리’인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해 미국 전역에서 계수를 0.5로 설정하면 안전하다는 의미로 미국에서도 0.2~0.3이 보편적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건축설비내진, 홀대받는 현실적 이유
첫째 문제는 국민적 관심이다. 소방설비의 경우는 재난 발생 시 구조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국민들이 과거 지진, 건물붕괴 등의 상황에서 소방 및 구조의 중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에 소방분야는 그나마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공약에 소방분야도 포함되는 등 정치권도 이에 호응하고 있다. 현재 인력 및 장비 면에서 부족하지만 안전에 대한 욕구가 지속된다면 소방설비분야는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건축설비는 지진이 빈번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설비의 전도로 사고를 당한 사례를 접하지 못해 국민적 공감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규모 5.8 경주지진도 우리나라 관측사상 최대규모였지만 건축설비 전도로 인한 사고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둘째는 우선순위의 문제다. 그간 우리나라 안전대응 방식은 예방보다는 대증요법과 사고대응, 피해복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최근 몇 년 사이 발생했던 수차례의 재난과정에서 가이드라인, 매뉴얼이 없어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진발생 상황에서 소방설비는 건축설비와 성격이 다소 다르다. 소방설비는 지진발생 시 사고대응과 피해복구 차원에서 사용되는 설비여서 지진이 발생해야 효용이 생기지만 건축설비는 그 반대다. 결국 소방설비내진은 대응의 문제, 건축설비내진은 예방의 문제다.

주목할 점은 대응과 예방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로 우선순위의 선후를 따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과거 재난상황에서도 매뉴얼 부재와 함께 컨트롤타워 부재 이슈가 함께 부각된 바 있다.

이에 대해 강기호 한국설비기술협회 고문은 “대응만으로는 완벽한 사후조치가 어렵다”라고 지적하면서 “예방적 차원에서 건축설비의 내진설계 규제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선진국 사례 시사점과 한계
우리나라의 건축물의 안전에 관한 제도는 의무규정에 의존하고 있지만 미국·유럽·일본 등은 이를 최소화하고 있다. 모든 기술기준이 분야별로 코드화돼 있고 표준과 매뉴얼이 갖춰져 있어 각 분야별로 설계, 시공, 준공, 유지관리까지 자율적으로 이뤄진다.

일본은 ‘건축법 시행령’에서 구조설계의 원칙을 정하고 있다. 급수·배수·배관 등 설비가 지진 등 진동과 충격에 대해 구조내력 상 안전하게 설치돼야 한다고 관련규정과 지침을 만들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국제건물규정(IBC: International Building Code)’으로 기계, 전기부품, 보일러 등은 물론 배관, 공조덕트, 지지대의 내진기준을 설정하고 자율적으로 따르게 하고 있다.

미국은 이와 함께 자발적 내진설비설계를 유도하기 위해 경제적 유인책을 사용하고 있다. 제품의 안전성을 인증하는 UL인증은 내진성능을 포함하고 있는데 미국화재보험협회가 이를 보험금 산정기준에 반영함으로써 해당 설비를 사용한 이재민에게 경제적 이점을 제공한다.

이에 대해 임칠호 한국방진방음 대표는 “물론 해외 사례처럼 시장에서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최선”이라면서도 “아직 대규모 지진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유인책을 제공한다고 해도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규제필요성을 언급했다.

결국 설비내진 규정을 잘 갖추고 있는 선진국의 경우는 대규모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국가여서 자발적 참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재해를 겪기 전에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사례와 연구결과를 토대로 정부에서 규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합리적 수준의 규제 필요
건축설비의 내진설계는 규제돼야 하지만 현실성을 고려해 적정한 수준이 설정될 필요가 있다. 건축설비에 소방설비 수준의 내진설계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내진의 기본 개념은 지진에 끄떡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붕괴를 막는 데 있다. 물론 소규모 지진에는 사후에도 최대한 기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좋지만 대규모 지진까지 완벽하게 견디도록 할 수는 없다.

진도 7.0을 견딘다는 것은 7.0의 지진이 왔을 때 구조부재와 비구조부재가 손상을 입더라도 붕괴에 따른 대규모 인명피해를 막는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사실상 진도 5.0~6.0 정도만 온다고 하더라도 건축물은 대규모 보수를 해야 하거나 철거해야 할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건축설비 내진은 이 점이 고려돼야 한다. 덕트, 배관 등 설비는 건축물이 붕괴되면 함께 교체돼야 하므로 건축물의 내진기준보다 강하게 규제될 필요는 없다. 붕괴되지 않더라도 큰 손상을 입어 철거나 재건축이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건축설비의 내진설계는 건물이 붕괴되지 않는 경우 전도, 붕괴, 파손을 막는 정도로 기준이 설정돼야 한다는 분석이다.

공조업계에서의 대비책은
건축설비 내진설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되는 문제는 설비 자체의 내진설계다. 통상 건축설비의 내진설계라고 하면 ‘건축물에 견고하게 부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진에 의해 건축물이 흔들릴 때 설비도 함께 고정돼 흔들리면서 이탈을 방지한다. 그러나 지진에 의해 건물과 함께 설비가 수평으로 흔들릴 경우 설비 내부에는 심각한 손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건축설비는 그대로 세워져 있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돼 있는데 지진에 의해 수평압력이 가해졌을 경우 이에 대한 대비가 없어 파손되기 쉽다.

만약 지진이 보다 빈번하게 일어나게 될 경우 장비파손에 따른 비용부담이 우려되며 사회적으로도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따라 건축설비의 내진설계가 본격적으로 추진될 경우 공조업계는 설비 자체의 내진설계 또한 고려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지진재난이 일상생활까지 위협할 정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발생 빈도 및 규모 면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국민적 요구가 있을 때 즉각 적용할 수 있도록 규제 및 기술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이뤄질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