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규모 전력과 재생에너지를 확보해 지방에 공급하더라도 반도체와 데이터센터기업이 실제로 해당 지역을 선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분석이 나왔다. 전력은 기업 입지의 필수조건이지만 최종 투자지역을 결정하는 단계에서는 전문인력, 고객·수요처 접근성, 산업생태계 등 비전력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가 추진 중인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와 AI 데이터센터 전용 전기요금제가 기업의 지방 이전을 유도하려면 단순한 요금 할인보다 가격·접속용량·공급시점·적용기간을 기업이 투자계획에 반영할 수 있을 정도로 사전에 확정하는 정책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녹색에너지전략연구소는 8월 발간한 연구보고서 ‘메가프로젝트가 기업을 움직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반도체·데이터센터 기업 설문으로 본 메가프로젝트 정책과 실제 입지 판단의 간극’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효은 녹색에너지전략연구소 부연구위원이 수행한 이번 연구는 반도체 제조·소부장 재직자 40명과 데이터센터·클라우드·통신기업 재직자 40명 등 총 8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응답자의 83.8%인 67명이 향후 5년 내 신규 사업장 또는 증설투자를 검토하고 있으며 29명은 의사결정 또는 검토·기획에 직접 관여하고 있어 실제 투자판단과 비교적 가까운 실무자의 인식을 반영했다.
보고서는 정부의 3대 메가프로젝트와 관련한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 △AI 데이터센터 전용요금제 △지산지소형 공급 △분산형 전력망체계 재편 및 계통 불확실성 완화 △서남권 전력·용수 적기 공급 등 5개 정책수단을 기업 입지판단과 비교했다.

전력은 ‘입지 진입조건’… 최종 선택은 ‘인력·수요처’
설문에서 기업 입지결정 요소 중 가장 높은 중요도를 기록한 것은 전력 공급 안정성으로 5점 만점에 4.15점이었다. 전기요금 수준도 4.04점으로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인허가 소요기간 3.99점, 전문인력 확보 3.95점, 협력업체·고객 접근성 3.92점과의 차이는 0.2점 안팎에 불과했다. 재생에너지 조달 가능성은 3.44점으로 전력 관련 항목 중 가장 낮았다.
더욱 뚜렷한 차이는 현재 수도권에 입지한 결정적 이유에서 나타났다. 전력 공급 안정성을 수도권 입지의 결정적 이유로 꼽은 응답자는 3.8%에 불과했다. 반면 전문인력 확보는 30.0%, 고객·수요처 접근성은 23.8%로 훨씬 높았다.
이효은 연구위원은 “전력 안정성과 비용은 해당 지역이 기업의 후보지 검토 대상에 들어가기 위한 ‘진입조건’ 또는 기본 적격조건에 가깝다”라며 “일정 수준의 전력조건을 갖춘 후보지들 사이에서 최종 입지를 결정할 때는 인력과 수요처, 산업생태계 등 기존 집적이 제공하는 이점이 다시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비수도권 선호 입지유형도 같은 결과를 보여줬다. 정부 투자계획이나 대기업·앵커기업의 투자예정지 인근이 41.2%로 가장 높았으며 광역도시 인근이 38.8%로 뒤를 이었다. 용수·환경 인프라 우수지역은 27.5%, 기존 산업단지는 23.8%였다.
반면 계통 여유지역을 선택한 비율은 15.0%,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은 10.0%에 불과했다. 반도체 응답자 40명 중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을 선택한 응답자는 1명뿐이었다.
RE100 수요 커져도 ‘재생에너지 생산지 이전’은 별개
재생에너지 수요 확대가 곧바로 기업의 지방 이전을 의미하지 않는 점도 확인됐다. 재생에너지 조달 가능성을 ‘핵심 입지조건’으로 평가한 응답은 6.2%였으며 ‘중요하지만 보완조건’이라는 응답이 40.0%였다. 반면 ‘부가조건’ 35.0%, ‘현재는 거의 영향 없음’ 18.8%를 합치면 53.8%에 달했다.
보고서는 이를 재생에너지 수요가 낮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현재 기업은 사업장을 재생에너지 생산지역으로 이전하지 않더라도 REC 구매, 제3자 PPA, 직접 PPA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생에너지 조달 요구에 대응할 수 있다. 실제 응답자의 62.5%는 사업장을 옮기지 않고도 재생에너지 사용요구를 충족할 수 있어 생산지역으로의 이전 유인이 약해질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전국 단일 소매요금체계로 지방의 전력비 우위가 기업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61.2%였으며 기업 인센티브 대상지역과 재생에너지 잉여지역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에는 60.0%가 동의했다.
반면 재생에너지 조달압력이 높은 기업은 정책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달압력이 높은 40명의 현재 지방입지 검토의향은 3.58점으로 낮은 집단의 2.75점보다 높았다. 지원조건이 확인된 이후 지방입지 검토의향 역시 3.98점 대 2.92점, 메가프로젝트 지원책에 대한 반응은 3.65점 대 2.75점으로 차이가 뚜렷했다.
특히 조달압력이 높지만 현재 지방입지 의향이 낮은 ‘전환대상군’은 지원조건 제시 전 2.60점에서 제시 후 3.40점으로 0.80점 상승했다.
이효은 연구위원은 “반도체나 데이터센터라는 ‘업종’을 기준으로 기업을 유치하기보다 RE100·공급망·고객사 요구에 따른 재생에너지 조달압력과 실제 신규·증설 투자단계를 함께 고려해 움직일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선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0% 할인, 부족”… 지역요금제 ‘체감격차’ 관건
최근 구체화되고 있는 산업용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와 기업이 요구하는 가격신호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도 확인됐다. 한국전력이 8월26일 공청회에서 제시한 설계안은 산업용전력 갑·을 전체에 ‘지역별 조정요금’을 신설하는 구조다.
보고서에 따르면 광역권 기준 인하폭은 수도권 남부 약 0~1원/kWh, 수도권 북부 약 6~10원/kWh, 중부권 약 10~15원/kWh, 남부권 약 13~18원/kWh다. 한전은 최대 인하수준을 산업용 전기요금의 약 10%로 설명했으며 소요재원은 2조8,000억원 내외로 전망했다. 해당 안은 보고서 작성시점 기준 최종 확정 전이다.
그러나 “비수도권 전기요금이 수도권보다 어느 정도 낮아져야 신규입지 또는 증설 검토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50.0%는 30% 이상의 요금격차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10~30%가 필요하다는 응답은 28.7%, 요금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응답은 12.5%였다. 10% 미만의 차이로도 충분하다는 응답은 8.8%에 그쳤다. 업종별로도 30% 이상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반도체 47.5%, 데이터센터 52.5%로 비슷했다.
이효은 연구위원은 “30%를 적정 할인율로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시설이전, 신규부지 조성, 공급망 재편, 인력 확보 등 기존 입지를 포기하면서 발생하는 ‘총 이전비용’을 상쇄하려면 기업이 상당한 수준의 가격격차를 요구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산업용 전체 수용가를 대상으로 소폭의 요금할인을 적용하면 정책재원의 상당부분이 기존 비수도권 사업장에 투입된다”라며 “실제 수요 이전이 발생하는 신규입지와 증설 투자에 요금 우위를 집중하고 이를 장기간 예측 가능하게 보장하는 방식이 입지정책 측면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AI DC 전용요금, 할인폭보다 ‘전력 접속확약’
AI 데이터센터 전용 전기요금제도 같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비수도권 대규모 AI 데이터센터에 대한 전력 적기공급과 용수 확보, 별도 AI 데이터센터 전용 전기요금제 신설 방침을 제시했다. 그러나 보고서 작성시점 공개자료에서는 대상용량과 할인구조, 적용기간, 부하특성에 따른 조건 등 세부내용은 확정되지 않았다.
이번 설문에서 메가프로젝트의 전력·용수 지원이 제공될 경우 지방입지 검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데이터센터 응답은 55.0%로 반도체의 37.5%보다 높았다. 데이터센터의 입지요인에서는 전력품질이 4.47점, 통신망 지연속도 4.40점, 수도권 통신망·IX 연계성이 4.30점으로 높은 반면 고객과의 물리적 거리는 3.42점으로 가장 낮았다.
또한 현실적인 지방 후보권역을 묻는 질문에서 데이터센터 응답자의 25.0%가 ‘특정 권역이 없다’고 답했다. 반도체산업에 비해 특정 산업클러스터에 물리적으로 묶이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일부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의 경우 전력가격과 통신망, 접속여건을 확보하면 입지를 이동시킬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이효은 연구위원은 “AI 데이터센터 전용요금제의 핵심은 단순한 ‘할인율’이 아니라 어떤 규모와 부하특성을 가진 데이터센터에 몇 년간 적용할 것인지, 각 후보지역에서 몇 MW의 전력을 언제부터 접속할 수 있는지를 함께 확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발전 1GW 더 연결해도 DC가 1GW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통정책에서도 발전측 접속과 산업수요측 접속을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는 호남·제주권 32개 배전선로에 ESS를 구축하고 2030년까지 약 700MW의 배전망 ESS를 보급해 재생에너지 1GW를 추가 접속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발전측에서 재생에너지 1GW를 추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해당 지역의 대규모 데이터센터나 반도체팹이 원하는 시점에 같은 규모의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문에서도 계통 접속 가능성과 소요기간 중요도는 3.76점이었으며 응답자의 65.0%가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실제 지방입지 검토가 무산된 경험이 있는 18명 중 전력·계통 불확실성을 이유로 꼽은 비율은 22.2%였다. 특히 계통제약에 대한 문제인식은 데이터센터가 3.83점으로 반도체의 3.20점보다 높았다.
이 연구위원은 “계통정책의 기업 유치성과를 평가하려면 재생에너지 ‘발전 접속량’과 별도로 전략 후보지별 수요 접속 가능용량, 접속 가능시점, 필요한 송·변전설비 증설일정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서남권 6.3GW 공급해도… 기업 후보지는 ‘충청 46%-호남 10%’
서남권 반도체 메가프로젝트는 공급계획과 기업의 실제 지역선택 사이의 간극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부는 서남권 신규 반도체산단에 전력 6.3GW와 하루 65만t 이상의 용수를 공급할 계획이다. 송·변전망과 용수 인프라의 조기 구축방안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비수도권 후보지역을 묻자 충청권을 선택한 응답자는 46.2%인 반면 호남권은 10.0%에 그쳤다. 반도체 응답자만 놓고 보면 충청권이 55.0%, 호남권은 10.0%였다.
재생에너지 조달압력이 높은 기업에서도 충청권 선택률이 57.5%인 데 비해 호남권은 12.5%였다. 재생에너지 사용 요구가 높은 기업이라고 해서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서남권을 자동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서남권정책의 목표를 ‘전력·용수 공급사업’에서 새로운 산업집적 형성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효은 연구위원은 “최종적으로 6.3GW를 공급한다는 총량보다 기업이 계획하고 있는 팹의 착공·가동 시점에 맞춰 어느 발전원과 송·변전설비를 통해 몇 GW를 공급할 것인지, 용수는 어느 수원과 공급인프라를 통해 언제부터 사용할 수 있는지를 단계별로 확약해야 한다”라며 “동시에 지역특화 전력가격과 장기 재생전력 조달조건을 통해 다른 비수도권 후보지에서는 얻기 어려운 경제적 우위를 먼저 만들고 이를 앵커기업 투자와 협력사 동반입지, 전문인력 유입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얼마나 공급하나보다 왜 그 지역을 선택해야 하나”
보고서가 제시한 메가프로젝트의 정책전환 방향은 5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를 단순한 지방 할인제도가 아니라 신규·증설투자를 움직일 수 있는 실질적인 입지가격 신호로 설계해야 한다.
둘째는 재생에너지 생산지역에 입지한 기업만 확보할 수 있는 장기가격, 우선 조달물량, 접속조건 등 추가 편익을 만들어 재생에너지 생산지와 기업 입지 인센티브의 공간적 단절을 줄여야 한다.
셋째는 ‘반도체기업’ 또는 ‘데이터센터기업’ 전체에 동일한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신규·증설계획과 지방 이전 가능성이 있는 개별 투자프로젝트를 선별하고 프로젝트별 병목에 맞는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넷째 계통·전력·용수는 기업을 유치한 이후 제공하는 지원이 아니라 입지검토 단계부터 접속용량과 공급시점을 확인할 수 있는 ‘준비된 후보지 조건’으로 전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서남권은 전력과 용수 공급실적뿐만 아니라 앵커기업 투자확정, 협력사 동반입지, 전문인력 유입 등 새로운 산업집적 형성과정을 정책성과로 관리해야 한다.
이효은 연구위원은 “메가프로젝트는 전력·재생에너지 공급사업이 아니라 기업의 실제 선택을 바꾸는 입지전환정책이어야 한다”라며 “핵심은 무엇을 더 공급할 것인가보다 어떤 기업을 어떤 조건으로 왜 그 지역에 움직이게 할 것인가를 설계하는 데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이번 결과는 반도체 40명과 데이터센터 40명으로 구성된 비확률 온라인패널조사로 응답단위 역시 기업이 아닌 재직자 개인이라는 한계가 있다. 산업 전체 기업의 의사를 대표하는 통계로 일반화할 수 없으며 AI 데이터센터 전용요금제와 일부 계통정책, 서남권 전력·용수정책은 직접적인 정책효과를 묻기보다 관련 문항을 연계해 탐색적으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실제 신규·증설 투자검토와 가까운 실무자를 대상으로 정책의 ‘공급 규모’와 기업의 ‘입지 선택’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정량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향후 지역별 전기요금제와 AI 데이터센터 전용요금제, 서남권 메가프로젝트의 세부설계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기준을 제시했다.